봄의 언덕/정무용의 사진 이야기

천주교 강화 그리스도왕 성당

깨어 있어라 (마르 13,33-37)

정이시돌 2020. 12. 4. 21:39

     나훈아의 ‘사랑’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아침에 소음이 될지 선물이 될지 모르겠지만 잠깐 불러 드릴까 합니다. 너무나 익숙한 노래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는 내 사랑아,’ (박수)

 

     제가 왜 이 노래를 불러드렸느냐 하면 대림절 강론을 준비하면서 ‘사랑’이라는 말이 맴돌았습니다. 이 노래를 흥얼흥얼 하다가 이 가사가 대림절하고 너무나 잘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노래에서 ‘내 여인아’, ‘내 사랑아’를 나의 이름, 나의 세례명으로 바꾸어 부르면 ‘내 바오로야’, ‘내 안나야’ 이렇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사랑’이라는 노래로 연결해 보면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사랑하는 바오로야, 베드로야, 마리아야’ 이렇게 됩니다.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는 내 요한아, 내 안나야, 루시아야’ 이렇게 하느님이 부르셨다고 생각해 보면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루만져 주시고 안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특단의 결심을 하십니다. 바로 자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이 땅으로 직접 내려 보내는 결심을 하셨습니다. 아들이 인간이 되심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땅에서 같이 어깨를 부딪치면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인간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시고자 그런 일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그 마음을,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는 대림시기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에게 좋은 것을 베풀려고 하십니다. 부모님은 못 먹고 못 입어도 자녀들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님의 사랑이라면, 사랑을 심어주신 하느님은 얼마나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을까를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하느님,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외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을 기다리며 기념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선물을 잘 받기 위해서 우리 또한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그러면 왜 하느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을까요? 예수님은 왜 인간이 되기를 자처하셨을까요? 하느님이 당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큰 이유는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멀어지는 인간을 다시 부르시고, 다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시키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루카복음(루카15, 11-32)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방탕한 생활을 한 그 아들을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하느님은 기다리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발 벗고 나선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표징과 실체’라는 신앙적인 용어를 통해서 깊이 묵상할 수 있습니다.

 

   표징은 쉽게 말하면 ‘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어디 가서 사인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사인(서명)은 ‘나’라는 ‘실체’를 대신하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그 자리에 없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나의 실체를 눈으로 볼 수 없더라도 내가 한 그 ‘서명’이 나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표징과 실체’입니다. 미사 때 거행하는 성체성사도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거행하는 강력하고 거룩한 표징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몸 안에 모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주인이 되어 하느님을 모시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손님이 되어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주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잘 모시지 않으면 훗날 우리도 손님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데, 우리는 그 사랑을 외면한다면 얼마나 서운해 하실까요! 당신의 소중한 아들을 선물로 내어 주셨는데 우리도 하느님께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 드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것들이 소중합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우리의 선물을 ‘가톨릭 성가 221번’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받아주소서’ 성 이나시오 기도입니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소유한 이 모든 것을,

주여 당신께 드리리 이다.

이 모든 것 되돌려 드리오리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면 쓸고 닦습니다. 마찬가지로 오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맞아들인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림초 네 개 가운데 첫 번째 보라색 초에 불이 밝혔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보라색은 회개를 상징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를 찾아오는 탕자가 바로 보라색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한걸음한걸음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 세상은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기보다 먹고 사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주님께 향한 시선을 흐트러뜨립니다. 하지만 그렇수록 우리를 향해서 오시는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우리의 자유와 기억과 의지를 주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쳐다보지 않으면 예수님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오시는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짝사랑으로 만들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오늘부터 시작하는 대림시기를 준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김현웅 바오로 신부님 강론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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