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렌트의 비유 (마태 25, 14-30)
이러한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하느님은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남자’라는 선입견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남자, 여자로 구분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하셨기에 하느님께서는 남자의 모상, 여자의 모상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느님은 부성으로서의 하느님, 모성으로서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모습, 어머니로서의 하느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재산을 맡기고 여행을 떠납니다. 능력에 맞게 종들에게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줍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은 그 돈을 활용해서 다섯 탈렌트를 벌어 주인에게 돌려주었고,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은 두 탈렌트를 벌어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혹시나 잘못될까봐 있는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받은 한 탈렌트를 다시 돌려줍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주인에게 1원 한 장 손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원금 그대로 상환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한 탈렌트를 반납한 종을 꾸짖습니다.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하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통 큰 아버지로서의 모습, 아들들을 믿고 통 크게 아주 많은 사업 자금을 아들에게 주는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그 사업 자금으로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을 때는 아주 엄하게 바깥으로 내 쫓는 엄한 아버지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어머니의 모습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종은 주인에게 ‘1원도 손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주인에게 손해를 하나도 끼치지 않았는데 주인에게 왜 모진 대우를 받아야 했을까요? 그 종이 잘못한 것이 무엇일까요?‘ 또 다른 질문을 해 봅니다. 만약에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이 열심히 사업을 하려고 했으나 잘못해서 주인이 준 다섯 탈렌트를 잃었다면 주인은 그 종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야단을 맞았을까요? 칭찬을 받았을까요? 이 장면에서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을 떠 올려 봅니다.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에게서 받은 돈을 날려 버렸다면 주인은 그 종을 책망하기보다 그를 위로하면서 다시 다섯 탈렌트를 더 주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끊임없이 자녀를 위해 밀어주고 위로해 주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밖에서 힘든 일을 겪고, 어깨가 축 쳐져 터벅터벅 귀가하는 자녀를 아무 말 없이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게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 다음 날,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서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어머니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한 탤런트를 받아서 손해를 끼치지 않은 종이 야단을 맞은 이유는 바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느님은 그 비유에 나오는 종은 자신을 믿고 무엇이라도 하고자 했다면 그가 이익을 봤건 손해를 봤건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주인은 그 종에게 마음껏 자기 꿈을 펼친 기회를 주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익을 낸 종을 칭찬을 하기 위함도 아니고, 손해를 끼친 종을 꾸짖기 위함도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탈렌트를 우리가 얼마만큼 쓰려고 노력하느냐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느님은 결과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부모님 같은 하느님으로부터 탈렌트를 받은 우리는 복음에서 걱정만 하는 종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통 크게 탤런트를 맡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동시에 어머니의 사랑으로 우리를 안아주고 용서하고 다시금 일어나도록 힘을 주시는 그런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앞에서 끌어주십니다. 어머니이신 하느님이 뒤에서 우리를 밀어주고 계십니다. 바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맡기신 탤런트를 마음껏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유형무형의 나의 재능을 주님을 위해 펼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김현웅 바오로 신부님 강론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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