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마르 13, 24-32
연중 제 33주일 (2021. 11. 14, 세계 가난한 이의 날)
+ 찬미 예수님!
오늘 제1독서에 ‘생명의 책’에 이름이 쓰인 이들은 구원을 받으리라’ (다니12,1-3)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어떤 이
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영원한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얘기는 당연히 심판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가지고 많은 잘못된 이단 종교들이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 이해가 가시요?
‘생명의 책’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종교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사
람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재물을 바치게 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종교가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신자로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소수에 적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하늘나라는 자리가
많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가 세상에서 경쟁하면서 살아가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누구보다 잘나야지 들어가고,
경쟁해야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늘나라는 자리가 많습니다.
저는 오히려 ‘생명의 책’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교회의 순교자들이 생각납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박
해 때, 그 때에 천주교 신자들을 죽일 때 자료 하나가 바로 ‘세례명부’였습니다. 그 곳에 이름을 올린 사람을 죽이는 것이
지요. 그래서 세례명부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고문 받고 순교를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고통 받고, 조롱 받고 죄인 취급
을 받으면서 죽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들은 영원한 성인으로써 우리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을 욕하고 죽
인 사람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마땅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들은 천주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종교나 종
교가 없는 사람들도 머릿속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상선벌
악(賞善罰惡)입니다.
이런 얘기가 오늘 복음애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신다고 합니
다. 세상의 정의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선한 이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복음에서 이야기 하
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판의 날, 재림의 날에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많이 느낍니다. 심판의 날, 주님의 날, 재림의 날,
이렇게 하면 누구든지 다 공포와 두려움을 느낍니다. 혹시나 심판의 날에 착한 이들에 끼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아니면,
내가 죽어서 주님 앞에 섰을 때 죄가 있으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지옥 가면 어떻게 하지? 연옥 가면 어떡하지? 이런 두
려움이나 걱정은 갖게 마련입니다. 이런 두려움과 공포심 때문에 우리들은 심판의 날, 재림의 날이라는 말을 들으면 예수
님을 믿고 있는데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저는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잘 들으시고 그런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제가 해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히려 이런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가정을 파괴하는 종교가 있습
니다. 천주교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천주교가 얘기하는 재림과 심판의 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 잘 들으시고 다른
분들에게도 전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를 안 가져도 되느냐, 바로 그것은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고 있는 이는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왜냐하면 바로 사람들이 기다리던 구세주의 모습이 예수님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힘에 억눌려 살았기 때문에 구세주라는 분이 오시면 죄인들을 다 죽이고, 벌을 주
고, 혼내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나요? 죄인들을 죽이셨나요? 악인 같은 바리사이들도 야단을 치셨
어요. 예수님이 큰 힘으로 바리사이들을 때리거나 저주하거나 그러셨나요? 야단치신 것도 성전을 더럽힌 것을 보고 야단
치신 것밖에 없어요. 오히려 예수님은 병자들을 돌보고 고치셨고, 고통 받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고
아와 과부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또한 악령을 쫓아내는 모습, 하느님 나라를 알려 주신 것,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
람들,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모함을 받고 십자가에서 돌
아가셨습니다.
이런 모습의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구세주를 원했나요? 큰 힘으로 죄인을 벌을 주고 종신형, 사형 등 이런
구세주를 원했는데, 예수님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이 실제 예수님의 모습이고, 시실입니
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심판의 날, 재림의 날에 예수님의 모습을 투영하면 많은 거짓과 오해와 과장된 것들이 사실
입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란다. 나는
심판하러 오지 않고,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심판을 좋아합니다. 폭력적입니다. 죄에 물들어서, 막 억눌려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로
구원을 하러 오셔서 이런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부님, 악인은 벌을 받지 않나요?’ 아닙니다.
악인은 벌을 받습니다. 성경에도 죄인이 스스로 주님의 은총을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
다.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무슨 말인가요?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성경에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은총
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미 체험합니다. 마치 우리가 세상살이가 힘들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
를 모시며 미사를 드리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이미 하느님 나라를 체험합니다.
반대로 죄인은 죄를 짓고 거짓말을 하고, 항상 마음에 미움과 불타는 분노를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스스로 이미 더
큰 파멸의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욕심은 더 커지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사람들도 다 떠나고 외로움을 느끼며 괴로워
하는 모습이 바로 죄인의 모습니다. 이렇게 죄인은 스스로 자기 죄 때문에 스스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죄인
도 진심으로 눈물로 회개한다면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영혼도 우리 삶 안에 들어와 희생을 통해서 기도의 은
총을 받을 수 있다고 교회는 말합니다.
위령성월에 저희가 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살
아서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빗나가지 않도록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우리가 죽은 후에도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되찾
고자 하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미사를 봉헌하면서 심판의 날, 종말, 이런 말을 듣고 자비로운 착한 목자이신 하느님을 자비 없는 심판자, 죽음
과 피를 보기를 좋아하는 그런 분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그런 잘못된 행동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비하하고 모독하
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늘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서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을 무척 사랑하시
고, 챙기신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앞장서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삽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해 주신 것이 나 자신에게 해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리고 한 성인은 여러분의 옷장에 옷이 남아 있다면, 그 옷은 사실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죄인들도 가난
한 이들을 돕는다면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 부당한 돈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건넨 그 사람에게 감사와 하느
님의 축복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렇게 죄인까지도 가난한 이들을 챙길 때, 복을 받는데, 선한 이들이라면 얼마나 더 받
겠습니까!
‘사랑이신 주님, 저희도 당신 자비를 닮아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박용태 루카 신부님 강론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