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책에 걸린 도깨비 6-1 / Dokkaebi on Iron-fence 6-1 / 2006 박진화
내 삶과 생각들
1
삶의 연민.
생각과 생각들의 겹침이 되풀이 될 때마다, 삶은 처연하다는 결론.
화가로서 내 삶. 여러 이유 때문이겠지만 갈피가 분명치 않다. 이렇게 지면을 통해 앞뒤없이 내 속을 하나하나 들추려는 까닭은, 내 삶의 갈피를 조금이라도 잡아 보고 싶다는 거친 욕망 때문이다. 그림에 집중할 때마다 수없이 시달려 온, 나를 확인시켜 내려는 것.
결국 그것으로 시작되고 그것으로 끝이 날텐데 나는 도무지 앞뒤가 없다. 흔들릴 뿐이다.
아무튼 해보는 것. 그래서 확인해보고, 안되면 또 해보고....
그것만이 최선의 따름일 게다.
2
1991년 여름. 나는 서울을 떠나 삶의 터를 강화로 옮겼다. 당시 상황으로 어려운 살림 형편이 주된 이유지만, 무작정 서울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 또한 컸었다.
‘서울을 벗어나서 살자.“ 특별한 대책이 없는 가운데 자주 지껄이던 말. 그 말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왜 서울을 벗어나려 했는가? 서울이 싫어졌던가 아니면 서울에서의 패배인가?
이유를 따지고 들자면 당연히 후자 쪽이다.
패배는 쓰다. 삶에 졌다는 사실은 쓰라리게 비참한 자신을 낳는다. 서울에서의 나는 비참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너무 일찍, 유년에 내 삶의 패배를 예감했던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내 삶은 실패할 것 같다는 느낌.
지금 생각해도 엉뚱하고, 조숙을 가장함이 한심스럽게 보이지만, 나는 그 이유 때문에, 지금껏 그림 앞에서 강박당하고 고통받으면서도 지탱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에 있어 서울을 뜨는 한 패배의 결과는 오히려 새로운 각오와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 강화 시절을 기점으로 다시 시작해 보자’라는 각오.
새 각오로 출발한 삶은 새 기분을 갖게 마련이다. 이후로 강화 생활은 점차 내 삶에 다소나마 안정을 찾게 하였고, 더불어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5년이 지난 지금, 결과는 아직 없다. 그러나 서울생활에 비해 내� 활기를 찾은 셈이니,
어떤 면에서 서울을 잘 떴다는 결론.
한 마디로 다행이다.
바다 / Sea / 1990 박진화
3
바다. 나는 바다를 원했다. 바다는 내게 근원이고 지표이며 향수로 존재한다. 고향 같닥도 할까. 바다는 지난한 내 삶에 원칙을 배태시키고, 작지만 내 꿈에 안식을 제공하곤 한다.
뒤뚱거리며 방황하는 나의 내면은, 거칠은 그대로 바다로 몰입된다.
거친 몸짓, 가쁜 호흡도 바다로 향하고 쓰라린 비참함도 바다로 향한다. 그래서 바다에서의 쉼과 바다에서의 안락을 꿈 꾼다.
아니 그런 바다 꿈을 꾼다. 바다는 나의 심연이다. 내 심연의 내적 흔들림도 바다처럼 일렁인다. 바다에 따르려고, 바다로 향하는 내 꿈은 아마 어린 시절의 결과인 듯싶다. 나는 바닷가에서 나고 거기서 자란, 남녘의 촌놈이다.
전남 장흥군 안양면 신촌리 288번지. 내가 태어나고 유년을 보낸 장소다. 집에서 1km 남짓한 남해는 항상 애틋한 술렁임을 내게 안겼다.
어린 기억은 남들과 툭별하지 않다. 그 언저리들에서 생겨난 꿈과 소망. 어느 하나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러나 무한한 바다 때문인지, 나는 일찍 내 생의 무상함을, 삶 전체의 무상을 느끼곤 했다.
특별할 것 같지 않는 나의 생. 그 예감. 평범하다 못해 결국은 실패로 결론지어질것 같은 예감. 그러나 당시 나는 그 이유로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명랑하고 밝았다.
지금도 나는 유년시절과 똑같은 속과 겉이 다르다. 속은 쓰리고 아프지만 겉은 늘 태평이다. 이 또한 바다에 연유된 까닭이라고 치면, 너무 심한 자의식 일런가.
아무튼 강화는 섬이다. 바다에 쌓여있다. 그런 이유였을까?
나는 바다로 향했고, 강화에 정착했다.
4
‘그림은 사십부터다.’ 그동안 줄곧 떠들어대던 말이다. 딴에는 바쁘지 않게, 생각의 결정들을 다소 늦게 잡아보려는 뜻으로, 또 그만큼 연륜이 되어야 그림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속셈에, 지난 10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왠 걸. 그 사십이 훌쩍 건너 뛰어 현재 내 앞에 섰다.
시간은 공포를 낳는다. 일상에 연속인 까닭에 순간 순간 긴장시키는 힘은 약할지라도 10년 20년, 훌쩍 건너 뛰면 두렵다. 단순한 세월의 무게 탓 만이 아닐 것이다. 하는 일 없고, 해논 일 없으면 그런 채로 죽음이 다가온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두렵다. 물론 나 뿐이랴만, 자괴감이 스민다.
너는 지난 10년을 어찌 어찌 보냈는가? 열심히 살았는가?
답이 없다. 물릴 수도 없고, 황당하다.
새가 있는 풍경 / Landscape with Birds / 1996 박진화
5
칠십구년에 박정희가 죽고 80년이 되었을 때 나는 대학 4년이었다. 당시 ‘자유’는 나 뿐만 아니라 젊은 작가들의 공통된 작업 의식이었을 것이다.
벗어나 보겠다는 것, 막연하지만 그 벗어남의 몸부림은 그 시대 정신의 명료한 실체였었다. 구속되지 말자. 한치의 압박으로부터라도 가능한 한 벗어나자. 그것은 나의 육체 전체를 실은 몸부림이었고 그 몸짓으로 했던 작업은, 날 것인 채로 싱싱해지고자, 평가 자체도 거부했던 기억이 새롭다.
‘앙테팡당전.’ 매년 열렸던 당시 그 전시는 그런 움직임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 즈음. 정확히 5월 18일에 광주에서는 뒷날 우리가 ‘5월 광주’라 일컫는 엄청난 일이 터졌다. 광주 학살이 진행된 것이다. 뒤돌아보면 문제는 내 자신이었는데, 서울에 있는 나로서는 그 소식을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교직과목 이수차 교생실습 기간은 정확히 5.18로부터 4주간. 대학은 문을 닫았지만 나는 휘문 중학교에 실습 중이었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에 따라 술렁이는 정도로 지나갔다.
7월까지 마찬가지, 뭔가 이상한 낌새 정도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정보가 부재한 상태서 그 전모를 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 했다. 이후 광주 일들을 조금씩 알게 된 것은 그 여름을 통과하는 8월 중순 무렵부터다. 학살이 무자비하게 자행됐다는 것. 심지어는 전라도 씨를 말리려는 획책까지 있었다는 설이 난무했다는 사실. 소문으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광주는 전라도에 위치해 있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다. 8월 말이던가 한 후배로부터 술자라에서 자세한 광주 경위를 설명 듣고, 순간에는 술만 부었지 사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정신없이 취했을 뿐이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때문인가. 도무지 실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슬픔은, 자학은, 천천히 매우 완만하게 왔다. 그 해를 마감하던 무렵 그러나까 80년 겨울부터 심한 갈등 상태와 동시 일단은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도 취직을 꾀해야 했다.
졸업 후 예일 여고 교사로 부임. 그러나 심적 갈등은 심연에 그대로 남아 몹시 혼란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호흡을 놓친 시점이 그때인 듯 싶은데, 그런 상태에서 나는 서서히 나를 학대해 가고 있었다.
궁극적인 결론으로 내 생의 패배를 그 때 처음 확인한 셈이다. 줄곧 떨칠 수 없었던, 나는 내 생의 길을 잘못 들었다는 자괴감. 그리고 절망. 광주는 서서히 그렇게 나를 누르면서, 아주 천천히 몸으로 스며들었다. 학살자에 대한 모든 분노는 오히려 나를 더욱 스스로 자학의 길로 끌어 들였다. 심한 자괴감에서 비롯된 자학증.
한 달치 봉급을 술집에서 날려 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6
급기야 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골방에서 불도 안 켠 상태로 며칠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82년말 겨울이었다. 그 해 2월, 그러니까 82년 초 봄. 친구 둘과 관훈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는데 젊은 작가 ‘3인전’이 그것이다. 추상미술의 한계. 나는 당시 내 작품이 싫었다. 많은 이들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그 전시 이후 나는 몇 달을 심한 두려움에 시달렸다.
드디어 나는 붓을 꺾겠다고 결심하고 (이 결심의 배경엔 한 여인과의 이별도 포함된다) 학교 교직을 내 던졌던 게 9월초. 그 순간부터 나는 완전한 방황을 시작했다. 대학시절을 포함, 그때까지의 모든 작품을 일단 모조리 다 버렸다.
그리고 처참해졌다. (대학 시절의 그림이 한 점도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젠 화가이기를 포기하자.’ 이렇게 해서 방황이 시작된 것이었는데, 그땐 정말 아무 욕심도 미련도 없었다.
다시 오월로 / To the May Again / 1988 박진화
7
83년 봄.
C선배하고의 잠깐 생활은, 스스로 나를 전환하려는 중요한 시점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내가 술을 퍼마시면 지껄였던 수없는 말들. 기억나는 것중 한가지. ‘그림은 생각으로 쥐어짜서 그려선 안된다. 그림은 그냥 속에 붓을 잡으면 솔솔 나오는 것이다. 그냥 척척 그려지는 그림이 아니고는 그림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림 때문에 고민한다. 그래서 나는 안된다. 나는 화가를 포기하겠다’가 대충 그때 지껄였던 말들의 골격이다.
수없이 마셔대고, 수없이 울었다. 나는 나를 죽은 시체처럼 함부로 다루었다.
자학과 방황. 밑도 끝도 없는 헤매임. 어떤 목적에서 헤맸던 게 아니다. 아무 정처없이, 기대도 희망도 없이. 아니 결국엔 자학조차도 없이. 허공에 붕 떠 버린, 지독한 절망의 순간들. 나의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힘들다는 핑계로 계속 술만 퍼마셨고, 그래서 더더욱 힘들었던 시절.
그렇게 83년을 보내고 84년 초반까지 보냈다.
대학졸업직후
젊은작가 3인전 출품작
일어서는 땅 / Rising Earth / 1988 박진화
8
그렇다. 민중미술. 나의 눈과 손으로 누군가를 속인다는 생각에 몸서리쳤던 시절이었으니, 이 땅을, 이 비참을 드러내는 입장에서, 민중미술은 나의 희망이 되었다. 방향선회가 된 셈이다. 84년 여름, 나는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매일 마셔대던 술이었지만, 이젠 뭔가 달랐다. 몇몇 동료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작당을 꾀하고, 궁리를 한 탓으로 뭔가 가능할 것 같은 느낌. 그래서인지, 나는 좀처럼 술이 취하질 않았다.
기대 섞인 설레임. 점차 내 몸이 조금씩 열려지는 것 같았다. ‘서울미술공동체’를 조직한 것은 그 해 여름이 지나고서 였다. 나는 열심이었다. 조금씩 확신이 든 까닭이었으리라. ‘나도 무엇인가 해볼 수 있겠다’라는 생각. 그때까지 비축됐던 죄의식과 두려움이 오히려 힘을 만들었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맛보던 자신감.
84년 가을은 그 자신감에 넘쳤고, 다시 붓을 잡게 되었다. 연일 술이었지만 부지런히 뛰었다.
그 결과가 ‘서미공’ 탄생과 아울러 나의 결혼. 이 두 문제가 해결된 시점은 85년 초 봄이었다. 이젠 다시는 그림을 버리지 않겠다. 화가도 포기하지 않겠다.
나는 85년을 들어서면서 3년의 방황 끝에 비로서 1차 정리가 되었던 것이디ㅏ.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것으로서.
9
85년 7월, 나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인 ‘20대의 힘전’을 동료와 함께 기획.주관하였다. 그 전시는 당국의 탄압을 받고 강제 철거됐음으로 해서, 언론도 떠들썩한 상당한 이슈를 남겼다. 당국의 공식적인 문화탄압사건이었던 것이다. 소위 ‘힘전사태’로 명명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는 10여일 간의 구속 상태를 체험했다. 이 사건은 나를 새롭게 변모시켰고, 작가 의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예술에의 믿음이 굳건해 진 것이다.
그 때부터 유화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년의 활동은 89년, 제 1회 개인전으로 결산된다. 이 때의 주된 작업 맥락은 내 내면의 저항을 거칠게나마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고, 92년 가을, 제2회 개인전은 내면의 심화 혹은 자성을 모태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의 입장에서 본다면, 80년대의 민중미술과 같이한 그간의 노력이나 작업의 외적 성과는 미약하다. 내면에서의 몸부림으로 더욱 뜨겁게 살아보려는 노력뿐, 그 외에 이룬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나로서는 어느 하나 탓할 게 없다. 내 운명은 그런 것이다.
나무 2 / Trees 2 / 1991 박진화
10
한 작가가 갖는 사회의식은 그대로 그 작가의 내 외면에 따른 미의식을 이룬다. 뒤집어 한 작가의 미의식은 그 작가가 갖는 사회의식을 결정한다.
한 작가의 작업이 그 사회의 동시대적 산물임을 인정하는 요량은, 바로 그 작가가 처한 삶의 의식이 그 작업의 중심을 이룬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간, 더 잡아서 15년 동안 내 행적은, 내 삶을 통해 얻어진 작업관의 확인 정도로 여긴다.
나는 삶을 중시하고, 시대를 중시하고, 민족을 중시한다.
왜 그것들에 집착하는가. 별 거 없다. 내 내면에 진실해지고 싶다.
바른 가치를, 바르게 대하고 싶을 뿐이다.
누구든, 그 개인의 삶은, 자체로 역사적 의의로 남게 마련이다. 삶은 따라서, 각기 한 개인의 것이라 할 지 라도 사회, 역사적 지표 위에 운명적으로 위치한다.
화가로서, 시대를 움켜쥐고 발 버둥쳐 보려는 내 경우, 나의 삶은 그대로 내 미의식의 질료일 것이다. 내 삶이 내 미학이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볼 때 나는, 내 그림은, 아름답지 못하다.
11
나는 작가로서 완성된 삶을 구하고 꿈꾼다. 내 경우 자연인의 삶은 애시당초 없다. 작가적 사명에 의해, 보다 나은 이상적 삶을 꿈꾸기 위해, 혹은 작가적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삶을 진지하게 받아 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 노력은 삶의 태도나 시각을, 내 범위 넘어로 확장시켰다.
총체적인 삶, 사회적인 삶, 정치적인 삶으로.
문제는 내가 가지려고 소망하는 삶이 그렇다는 것이지, 내가 취한 삶의 태도가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죄의식에 몹시 시달리는 삶, 아마 그것이 내 삶의 정체였다.
‘삶의 근원.’ ‘삶의 본질’에 부딪히려는 내 욕망은, 나는 작가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그 편으로 삶의 중심 이동을 꾀하려는 내 노력에 다름아니다.
작가적 삶으로의 이동. 그 지향. 그 욕망의 흔들림.
이게 이제껏 내가 취한 의식이고 행보였다면, 내 삶은 작가적 삶을 이뤄냈을까? 물론 부정적이다. 이룬 것이 없으니 아직도 그 꿈 언저리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흔들림. 의식과 욕망의 할딱거림. 벅찬 가슴. 가위눌림.
이런 것들이 범벅이 된 십 수 년. 나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1차 개인전 서문에 나는 낮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내 자신에게 한 말이니 거칠 것은 없지만, 그 낮아져야 한다고 말한 바는, 아마 이런 이유로 낮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내 삶의 심사를 두고 한 말인 듯싶다.
벼가 익으면 고개 숙인다는 말은 나에게 과분하고.
아무튼 자연인의 삶과 작가적 삶은 구분된다. 이것은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자연인의 삶과 작가의 삶은 엄격히 구별하되, 그 구별함으로 통합을 꾀하는, 즉 한편으로 작가의 삶을 고집하고 또 한편 작가의 삶을 버려내는 양면적 삶을 취하고 싶은 것이다.
지식인으로서 삶은, 범 인간적 삶의 가치로 지향해야 한다는, 그런 심사인 것이다.
너무 교과서적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어차피 작가의 삶의 원형은 오히려 낡고 구태적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낡고 구태적인 삶의 태도라도 실천의 무게가 실릴 때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사적(史的)으로 보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누구라 할 것 없다. 가령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를 보자. 아! 역사는 찬란할지 모르지만 개인에겐 매우 가혹하다.
한 지식인으로서 숙명의 앞뒤를 정확히 읽고 처해진 삶을 산다고 할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12
흔들리면서 부여잡고 뒹굴면서 곧추세우는 중심 하나, 중심을 찾는 행보는 어지럽다.
왜 중심이고 어떤 중심인가. 중심 찾기는 꿈꾸기이다. 꿈은 아름답게 멋지게 가질 수 있다. 또 꿈은 비밀한 내면의 힘이 있는 한 무한히 지속시킬 수 있다.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움. 그것은 그리움이며 꿈꾸기이다.
그런데 그 꿈꾸기가, 꿈의 그리움들을 지속적으로 가져가기가 힘겹다.
이상한 일이지만 몹시 힘겹다.
‘보다 나은 삶,’ ‘좋은 세상’은 꿈의 실체요, 나의 중심이다. 그 이상적(理想的) 향기는 지난한 우리 삶을 따뜻이 감싼다. 그래서 작가는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그런데 힘겹다. 오히려 꿈 때문에 절망한다.
조국의 분단 현실은 이미 반세기를 지난다. 분단국. 분단 민족의 삶.
매우 현실적이면서 매우 추상적이다. 분단의 과제는 통일이다. 명제는 있는데 답이 없다. 비켜설 것인가, 체념할 것인가.
엄격한 주의를 요한다. 혹, 세상을 넓게 볼 필요가 있다면 그것을 세상에 관대해지는 것일 거다. 세상에 관대해지는 것. 내 삶을, 처지를 심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속으로 속으로 그 속에서 사느라 끙끙, 그러면서 꼼지락거린다. 더욱 부질없으므로 더욱 어지럽다.
나는 이렇게 내던진다. 꿈의 필요, 꿈의 절박만을 그리워할 뿐이라고, 그게 어렵다면 우선은 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닌, 꿈꾸기를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나는 아오지 근처 어디서 소주 한 잔 하고 싶다. 그러나 그 소망이 내 속에서 진실로 우러난 나의 절실함일까?
깊이 생각해 본다. 정말 두렵다.
13
가능을 꿈꾸며 불가능에 접근한다? 아애기는 된다. 화가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는 분명히 처연함이 따른다. 비참에는 맛이 없다. 슬픔에 무슨 맛이 있겠는가. 혹 슬픔에도 맛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나를 씹는 맛일 게다. 아니 그것도 추상이다.
맑은 날씨에 햇볕 가득하고 그림자가 진다. 이 분명함에도 엄연히 따르는 추상.
더욱 낯설고 모호할 뿐이다.
14
강화읍 대산리에 있는 내 작업실은 그 공교로운 위치 때문에 북이 한눈에 저 멀리다. 정말 북한을 볼 수 있다. 내 작업실을 스스로 이름하여 사북헌(斜北軒)이라 한데는, ‘비켜서 북을 본다’ 혹은 ‘북이 비켜 보인다.’ 정도에서 이름한 것인데, 그 속 요량엔 사선으로 북을 관통해 내려는 거대한 욕망이 있다.
부끄럽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분단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닐테니.
사유 형태는 시간뿐 아니라 장소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곳 나름의 생각이 각기 연유되는 이유는 그래서 분명하다.
남.북의 접한 지역. 그곳에서의 붓질. 나는 무엇을 꾀하려 하는가. 무엇을 의도할까.
간간히 들리는 대남.북 방송. 철책의 산보 길. 나무없는 북한의 산. 하늘을 가르는 철새 떼.... 그것들이 내 눈에 들면서 나는 어떤 생각을 더듬는가.
왜 술렁임으로 주체하지 못하는가.
15
내 생각들은, 사유의 틀은 당연히 내 작업의 질료가 될 것이다. 내 생각들은 따라서 내 그림의 주제들이 된다. 그 주제들은 내 미학의 스펙타클을 이룰 것이다. 거창한 얘기로 미학이지 내 그림의 전반적인 생각에 다름 아니다.
생각에도 힘이 든다.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밥을 많이 먹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궁리하는 것조차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힘이 필요하다. 순간적인 힘이 아니라 힘의 지속이 필요하다. 나는 무엇으로 내 힘의 지속, 유지를 위한 동력을 만들까.
의심하기? 끝없이 의심하기? 그 의심하기도 몇 발짝 못 가서 지친다.
내면의 흔들림도, 그 떨림이 심해질 때는 아무 형체도 없이 모든 것이 휘발되어 버리고 속절없는 어지럼증만 남는다. 멀미하는 것처럼. 도무지 황당하다. 지속이 어렵다.
그래서인가. 내 생각들은 분절과 뒤집음이 거세다. 한마다로 갈피가 분명치 않다. 물론 고쳐 생각해 봐도 그것이 내 의욕, 의지의 동력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혼란이고 혼돈이다.
혼돈을 에너지원이라고 얘기한다면 그럴 듯하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뭉치는, 뭉쳐지는 속성보다 흩어지는 속성이 강한가 보다. 끌어내면 끌어 낼수록 잘디잔 파편으로만 남는다. 밥알이 뭉쳐 한 그릇의 밥이 되듯이, 그 파편들도 그럴 수 있을런가. 그렇다면 문제는 그것을 건져내는 그물 일텐데.
아무튼 어지럼증을 동반하여 위태위태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삶은 한 마디로 지겹다. 80년대의 미술이 한 쪽으로만 치닫을 때, 나는 예측했다,앞을.
지금 보니 그 예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위한다. 나 말고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는 나를 위로한다. 분절과 뒤집음의 부단이 오히려 필요하다고, 이제껏 잘 해온 거라고, 힘내라고.
그러면서 스치는 생각. 속으로 찡하다. 누구든지 자신을 어루만지는, 감싸주는 손은 자신의 것밖에 없는가.
허허롭고 쓸쓸하다. 정말 쓸쓸하다.
자화상 2000 / Self-portrait 2000 / 2000 박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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