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언덕/정무용의 사진 이야기

천주교 강화 그리스도왕 성당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강론

정이시돌 2020. 10. 8. 10:40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강론

 

        2독서 바오로의 말씀을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필리 4, 6-9)  솔직히 이 구절을 대하면 한숨이 나옵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하고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 걱정 없습니까? 늘 감사하십니까?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 , 걱정을 해서 걱정거리를 없앨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걱정을 해도 걱정거리는 그대로 있습니다. 걱정은 우리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사도 바오로는 무슨 이유로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필리피서는 옥중서간이라고 불립니다. 사도 바오로가 감옥에 갇혀서 수감 생활을 하며 쓴 편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왜 감옥에 갇혔을까요? ,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기뻐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상황을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지나친 걱정입니다. 좀 구체적으로 애기하면 걱정만 하는 게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걱정하느라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리고 우왕좌왕하고 계속 걱정만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지나친 걱정, 걱정만 하는 모습은 쳇바퀴를 돌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쳇바퀴를 돌리는 모습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걱정을 하는 모습은 쳇바퀴를 돌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정말 사도 바오로는 아무 걱정이 없었을까요? 사도 바오로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자신이 걱정을 해야 할 것과 자신이 받아들여할 것을 구분을 했습니다. , 하느님께 맡겨야할 일이 무엇이고 내가 걱정하거나 풀어야할 문제가 무엇인지 구분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두고 걱정해봐야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고민해서 바꿀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이것은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지 고민할 일이 아니야하고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필리피서에 보면 감옥에 갇힌 상황, 사도 바오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받아들여야할 상황인 것입니다. 이 일을 두고 억울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필리피서 1장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할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필리 1,17) 어떻게 하면 바오로를 괴롭힐 수 있을까 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필리 1, 18)

 

       이렇게 사도 바오로는 감옥에 갇힌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재판 과정에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모습으로 재판관, 간수, 동료들을 대할지 생각합니다.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드릴까를 생각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안에서 배우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자고 합니다. 내가 감옥에 갇힌 억울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본받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인연을 뛰어 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에 임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인연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걱정이 포함됩니다. 또한 그릇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람의 인연을 뛰어 넘는 하느님의 평화 만이 걱정 없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작인의 모습을 보면 소작인들의 걱정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포도밭을 주인에게 돌려 줘야할 일종의 세금, 소작료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인에게 돌려 줘야할 것을 덜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아니면 아예 안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들의 고민거리였고 걱정거리였습니다. 해결 방법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하면 포도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각을 합니다. 비슷한 얘기가 구약 성경에도 등장합니다. 바로 카인과 아벨이야기입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을 저지릅니다. 왜냐하면 걱정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인의 걱정, 고민거리는 왜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내 동생 아벨만 좋아하시지? 라는 그런 그릇된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건 올바른 걱정이 아니라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카인은 자기가 받은 것보다 받지 않은 것, 동생이 받은 것을 탐내고 불공평하다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집니다. 카인은 자기의 걱정거리를 사람의 이해 안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사람의 이해를 뛰어 넘는 하느님 안에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카인은 동생 아벨을 경쟁자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동생이 없어지면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거야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어 무서운 살인을 범하게 됩니다.

 

         오늘 등장하는 소작인, 구역성경에 등장하는 카인, 이들의 공통점은 왜 나만!’ 이라는 불평, 그리고 만 없다면’, 하는 그릇된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를 놓치는 실수를 범합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누구와 비교하게 됨으로서 없는 걱정까지 떠안게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모임에서, 직장에서 저 사람만 없으면, 직장 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을 텐데, 저 사람만 없으면 우리 모임이 더 잘 될 텐데……., 본당에서도 어떤 형제님, 자매님이 보기 싫어서 성당에 나오기 싫어, 누군가가 없다면 기쁘게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허망한 생각들을 합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걱정과 불평이 우리들의 믿음을 나약하게 합니다. 그런 일들을 피할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 안에서 의미를 찾고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 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도 억울하셨을까요? 왜 저를 버리셨냐고 따지신 것일까요? 성경학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찌하여이 단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라는 의미로 왜 제가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까. 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디에 쓰시려고’, ‘무엇을 위해서라는 뜻도 포함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 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은 저의 고통을 어디에 쓰시려고 하십니까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어찌하여라는 그 말 안에서 모든 걱정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나의 옥살이를 어디에 쓰시려고 하십니까라고 생각하고 실천하며 변화됩니다. 기도하며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어찌하여라는 물음에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여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봅시다. 수많은 걱정거리 앞에서 걱정만하고 있는지 아니면, 걱정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봅시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을 묵상하며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  께 아뢰십시오.”

        아멘.“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김현웅 바오로 신부님 강론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