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보면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있습니다. 폴리페모스라는 괴물입니다. 폴리페모스의 특징
은 눈이 하나라는 점입니다. 이마에 눈이 하나 박혀 있습니다. 비록 신화이긴 하지만 사람을 헤치는 괴물을
외눈막이로 묘사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도 이기심이나 탐욕에 눈이 멀게 되면, 마음의 눈이 멀게 되면 내 눈이 아니라 내 마음의 눈이 멀게
됩니다. 그로인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그리스 신화는 우리에게 이야기 해 줍니다. 육신
의 눈이 아무리 멀쩡하다 하더라도 영혼의 눈이 멀게 되면 우리는 영적인 외눈박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외눈박이 된다면 다른 사람 눈에 외눈박이 괴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을 신화를 통
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잘 모릅니다. 눈에 질병이 생겨서 안대를 하고, 한 쪽 눈으로만 생활을
해야 한다면 참 많이 불편해 집니다. 거리 감각, 공간 감각이 많이 떨어지게 됩니다. 또 한 쪽 눈으로만 보면
볼 수 없는 사각지대도 많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한 쪽 눈으로 보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다 보면 그것이 또
맞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외눈박이가 된다면 타인을 옳게 바라보기가 힘들어 집니다. 나
의 기준에서만 보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
다.
성 금요일, 오늘 십자가의 길을 하셨나요? 십자가의 길 제8처! 뭘까요?
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 합시다’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본 여인들이 슬픔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녀들에게 이
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 때문에 울어라.”(루카 23. 28) 하셨습니다. 십
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울
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수난에는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
는 슬퍼할 줄 모르는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주
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사도행전은 계속해서
이야기 해 줍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2, 27) 그들이 베드로에게 던졌던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어
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마음이 꿰찔리듯 마음이 아파했던 적이 과연 우리는 있었을까요?
또한 예루살렘 부인들처럼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선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더 크게 슬퍼하고 눈물을 흘려야
할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 보았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도 신앙의 외눈박이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육신의 눈은 멀쩡하지만 영혼의 눈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은 아닐런지요.
또한 영혼의 외눈박이와 관련해서 이런 묵상도 해 봤습니다. 어제 성 요일 주님 만찬 미사를
거행하면서 이 제대 위에 놓인 성체를 보면서 이런 묵상을 해 보게 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를 먹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빵으로, 밥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누군가에게 밥이 된다는 것, 빵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실 우리는 만만한 사람
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쟤는 내 밥이야!’ 세상은 서로 먹겠다고 아귀다툼을 벌리면서 내 밥이 되어 줄 사람,
자신의 밥이 되어 줄 사람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진해서 먹히시겠다고 스스
로 우리의 밥이 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 그런 예수님의 모범은 보지 못한 채 육신의 밥에만 시선을
돌리고 살아가는, 밥이 되어 줄 누군가를 찾고 있다면 우리는 영혼의 외눈박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
니다.
요한묵시록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당연히 울어야 합니다. 하지만, 물에 술탄 듯 술에 물
탄 듯 미지근한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더 슬프게 울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나태해 져서 영적인 죽음을 향해
무턱대고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우리의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옳게 눈물을 흘리고 있나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에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나 자신의
미지근한 신앙을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적은 얼마나 될까요?
‘십자가의 길’에서 여인들처럼 주님의 수난을 보면서, 감상에 젖어서 눈물을 흘리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슬퍼하며 눈물을 흘려 봤는지, 내 밥이 되어 줄 사람이 없어서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남을 위해서 밥이 되어
주지 못해서 눈물을 흘린 적은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서 울어라’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거룩한 참회의 눈물을 내 자신
을 위해서 흘리는 은총의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김현웅 바오로 신부님 강론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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