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마르코 1,12-15)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마르코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시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 안에서는 간단하게 나옵니다.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한 줄로 짧게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유혹을 받으셨는지 아시죠? 세 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무엇 이였을까요? 사탄이 유혹한 것은 돌덩어리 하나를 갖다 주면서 이 돌을 한 번 빵으로 바꿔봐라! 하고 유혹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높은 건물 위에 올라가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한 번 뛰어내려 봐! 라고 유혹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나한테 절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와 권력을 너에게 주겠다고 유혹을 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을 하게 되는데요. 여러분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앞에 매일미사 책이던 성가 책이던 빵으로 바꿀 수가 있는지! 하실 수 있습니까!(없습니다) 저한데 와서 돌을 주면서 빵으로 만들어 봐! 라고 하면, 그것은 저한테 유혹이 아닙니다. 놀리는 거죠. 우리한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유혹은, 불가능 한 것은 유혹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어야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했다는 것은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예수님께는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한테는 유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도, 뛰어내리는 것도 예수님께 유혹을 했지만, 역으로 사탄은 이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한 번 해봐’라고 내 꼬임에 넘어가는 가를 지켜 본 것이죠.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꿔 얘기하면 이 분이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진짜 구세주라는 것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사탄도 아! 예수라는 사람도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시구나’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불과합니다. 사탄도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사탄도 인정했는데 우리가 인정 못하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분은 바로 그런 분이시라는 거죠. 사탄마저도 인정한 분을 놔두고 엉뚱한 곳, 이상한 곳에 가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혹이라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고 내 마음을 흔들리게 만드는 것이 유혹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은 늘 그럴싸한 명분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제가 종종 이런 예를 말하는데요. 티브이에서 맛집 프로그램도 많고 여행 프로그램도 많잖아요! 그런데 만약 티브이에서 두바이 칠성급 호텔에서 유명한 셰프가 만든, 하룻밤 묵는데 몇 백만 원이고, 한 끼 식사에 몇 십 만원이라고 나오면, 먹고는 싶지만 우리에게 유혹은 아닙니다. 못하니까요. 그럴 돈이 없으니까요! 또 다른 광고에는 치킨 광고가 나옵니다. 그러면 그 치킨 광고는 저한테 유혹입니다. 왜냐하면 전화를 해서 시킬 수 있으니까요. 이처럼 유혹은 엄청나게 큰 것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늘 그럴싸하고, 내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고,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렇게 친근하게 우리 마음을 간지럽히면서 꼬드기는 게 유혹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또 다른 유혹도 있었습니다. 사탄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얼마 안 있으면 사람들 앞에 끌려가서 사형선고 받고 죽게 될 거야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나서서 펄쩍 뛰면서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는데요. 그 때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시면 그 길을 안 갈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렇게 만류하는 역시도 예수님에게 유혹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길을 꺾을 수 있는 유혹이지요.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밑에서 지켜보던 사람들, 왼편 십자가에 달렸던 그 죄수도 예수님을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죽었던 사람도 살렸다면서, 한 번 너 자신을 살려보라고! 그리고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만약 저였으면 와우! 한 번 보여줘! (웃음) 한 번 짱! 하고 내려 가! 예수님은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조롱도 유혹이었던 것이죠.
우리에게 친숙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교묘하게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싸한 명분들,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합리화하는 모든 것들이 나를 유혹하는 사탄의 꼬임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시기를 늘 그래야 하겠지만 다시 한 번 정신 차리는 거죠. 그동안 내가 이런저런 명분으로 ‘에이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되겠지’ 라고 합리화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것, 이것이 혹시 나를 유혹한 것이 아니었나! 되돌아보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겨울철이 되면 이런 장난을 해 보셨는지요. 겨울이 되면 손이 몹시 시럽잖아요. 교실에서, 아니면 놀다가 친구 목덜미에 시린 손을 한 번 넣은 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면 순간 정신이 확 들지요. 깜작 놀라면서! 사순시기 유혹으로부터 그렇게 정신을 차라는 것이지요.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선포되는 말씀은 요엘 예언서입니다. 재의 수요일 1독서가 요엘서로 시작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요엘 2, 12-13) 이것이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단식이 무엇일까요? 음식을 끊는 것입니다. 안 먹는 것이지요. 굶는 것입니다. 단식해 보셨습니까? 요즈음 다이어트 한다고 단식 참 많이 하지요! 사실 한 끼 안 먹는다고 죽지 않습니다. 영양이 넘쳐나서 문제지요. 그런데 단식의 의미는 한 끼 안 먹는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꼽으라고 하면 의식주를 꼽습니다. 추위를 지켜주는 옷이 필요한 것이고, 생명을 보전하는 음식, 살아가는데 필요한 거주, 집입니다.
그런데 단식은 음식을 의도적으로 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예수님께 던진 첫 번째 유혹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먹지 않으면 죽으니까, 40일 동안 단식하신 예수님 앞에! 단식은 육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육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단식은 마음의 단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이어트 때문에 한 끼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이 소중한 음식을 일부러 안 먹는 것은 내 건강, 내 육신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재의 예식을 합니다. 사제가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그런데 먼지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는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어차피 죽으면 썩어서 흙이 될 몸, 대충 살지! 이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땅의 먼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땅의 먼지는 처음부터 있었을까요? 땅도 흙도, 흙의 먼지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십시오.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인생은 재로 끝나버리는 허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삶의 종착역이 땅의 먼지로 돌아가고 한 줌의 재로 끝나버릴 것이라면 육신의 단식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음의 단식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삶의 종착역은 흙이나 땅의 먼지가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식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한 끼를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사순시기에 단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래야하지만 사순절, 마음을 찢는 때입니다. 그래서 방금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첫 선포되는 요엘예언서에서도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 무엇인가를 찢는 다는 것은 아픔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그 아픔은 치유를 위한, 더 건강해지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자면 기쁜 아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평소에 안하던 운동을 갑자기 한다거나, 평소에 안하던 산행을 한다면 그 다음 날 아침에 어떨까요! 근육이 뻐근하고 온 몸이 쑤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픔이나 고통은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바꿔 이야기 한다면, 아!, 그동안 건강에 소홀했구나! 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하나의 신호이기도 하고, 또한 아! 그래, 계속 운동해야지! 라는 것들을 알려주는, 그래서 보다 건강해지기 위한 첫 걸음인 것이지요,
그렇게 보자면 고통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아 지난 나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훌륭한 신호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순시기에 희생을 하고 극기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찢는 그 고통, 지금 당장은 해오던 것을 안 하려고 하니까 힘들 수 있고 조금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것이 게을렀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도구이고 앞으로 건강해지기 위한 첫 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방금 전 복음 환호성은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그렇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생명은 바로 우리 정신이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에 달린 것이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고, 종착역에 하느님으로 돌아가니,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한 번쯤 생각해봐야할 단식의 의미인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단순히 옷을 찢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을 수 있는 회개를 통해서 부활의 여정을 향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2024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육신의 단식과 더불어 마음의 단식을 통해서, 고통을 향해서 기쁜 부활절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김현웅 바오로 신부님 강론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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