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1. 9시 미사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코 6.7-13)
오늘 제1독서 아모스 예언서에 관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볼까 합니다. 가장 지혜로운 임금인 솔로몬이 죽고 나서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쪼개집니다. 남쪽 유다 왕국, 북쪽 이스라엘 왕국으로 나뉩니다. 남쪽 유다 왕국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하보암이라는 사람이 임금이 돼서 나라를 다스리고, 북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부하였던 예로보암이라는 사람이 임금이 돼서 나라가 분리됩니다. 북 이스라엘 임금인 예로보암과 남 유다 임금인 르하보암 사이에는 늘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갈라진 것도 마음 아픈데 둘로 갈라져 끊임없이 서로를 미워하는 전쟁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아모스 예언자와 아마츠야 사제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아모스 예언자는 남 유다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마츠야 사제는 북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 유다 사람인 아모스가 북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을 합니다. 그것도 보통 예언이 아니라 아주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합니다. 오늘 독서 말씀 앞 구절에 보면 아모스가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북 이스라엘 임금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을 것이고,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 고향을 떠나 모두 유배를 갈 것이다.”(아모 7,12-15) 라고 예언을 합니다. 남 유다 사람이 북 이스라엘에 가서 ‘이 나라는 멸망할 거야, 아 나라의 임금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을 거야’ 하고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까요? 그래서 북 이스라엘 사제 아마츠야가 나섭니다. “남 유다에서 온 아모스라는 작자가 북 이스라엘 한 가운데서 임금님을 거슬러서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참아낼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아마츠야 사제 입장에서 보면 남 유다 사람이 와서 북 이스라엘에서 예언을 하는 게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기 나라의 멸망과 임금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츠야 사제가 아모스에게 직접 이야기 합니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빌어먹어라.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선전이다.” (아모스7,12-15) 그런데 여기 반전이 일어납니다. 아마츠야 사제는 아모스가 예언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모스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시고 이리로 보내신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은 들은 아마츠야 사제는 아모스를 하찮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아모스를 예언자로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모스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사실 아모스의 예언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임금에게 직언을 하고, 북 이스라엘 사람들을 꾸짖어야 하는 일을 하는 데, 하느님의 부르심에 탐탁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아모스의 모습도 오늘 복음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위해서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명의 제자들은 아모스 예언자처럼 그냥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엔 어부 출신이 네 명이나 있었고, 두 명은 그 당시에 죄인이라고 여겨지던 세리였습니다. 열혈 당원도 있었고, 장차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도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다지 제자로 삼고 싶지 않은 그런 인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고,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예언자로 뽑으신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뽑은 열두 명의 제자들을 아모스가 하느님께서 황당한 말씀을 들은 것처럼 제자들도 황당한 말을 듣습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가져가지 마라’고 하십니다. 아니 제자로 뽑으셨다면 넉넉하게 준비시켜야 되는 데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는 제자들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들에게 병을 고쳐 주는 놀라운 일들을 하게 됩니다. (마르 6,7-13)
사도행전 5장 29절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라고 합니다. 바로 아모스가, 열두 제자가 보여 준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서는 옳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주변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그저 나를 부르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루카 10,21-24) 라는 기도처럼, 하느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북 이스라엘 예로보암 임금과 아마츠야 사제를 깨우치려고 하셨습니다. 또한 열두 제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예로보암 임금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개 됩니다.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아모스의 말을 들었을까요? 아니면 북 이스라엘 사제 야마츠야 말을 들었을까요? 예로보암 임금은 야마츠야 사제의 손을 들어 줍니다. 그 결과는 아모스가 예언했던 것처럼 ‘예로보암은 살해되었고, 북 이스라엘은 유배를 갈 것이다.’라는 말이 실현되게 됩니다.
반면에 복음에 등장하는 열두 제자, 그들의 선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복음 말씀처럼 많은 이들이 마귀에서 해방되고 병에서 치유되었습니다. 열두 제자들이 선교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그들의 초라한 행색이나 흙수저 출신이라는 보잘 것 없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그들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놀라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의 눈과 귀를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게 하는 많은 유혹들이 우리게 다가옵니다. 사람들의 겉모습이나 외모로만 판단하려는, 혹은 내 마음 안에 있는 욕심들, 명예욕, 출세욕, 재산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게 되고 옳바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눈과 귀를 흐리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느님께 올바르게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우리는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 등장하는 예로보암 임금과 야마츠야 사제,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모두 깨어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복음 선포에 귀를 기우려서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많은 이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 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라고 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좋으신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눈과 귀를 흐리게 하는 많은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주님 은총 안에서 청하시를 바랍니다.
아멘!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김현웅 바오로 신부님 강론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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